▒ 연암연구소 ▒
 
작성일 : 11-12-15 00:13
박규수이야기
 글쓴이 : 능재
조회 : 1,277  
 
모 TV에서 요청하여 출연한 
'도심속 역사이야기' '북촌의 옛자취를 찾아서' 인터뷰자료를 정리한 내용과 녹화된 것중의 일부를 켑쳐하여 올려본다. (12월24일 23시 방송예정)
 
 
박규수 이야기
1807(순조 7)~ 1876(고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박규수는 서법(西法)에 대한 동교(東敎)의 우월성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실학사상의 연장선상에서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교량적 역할을 했다. 본관은 반남(潘南).자는 환경(桓卿)·환경(瓛卿), 호는 환재(桓齋)·환재(瓛齋)·환재거사(瓛齋居士)등으로 불린다.
 
할아버지는 지원(趾源)이고, 아버지는 惠田 종채(宗采)-이며, 어머니는 유영(柳詠)의 딸이다. 그는 15세부터 문명을 떨쳤으며,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교유하면서 〈주역〉을 강의하고 서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1830년 세자의 급서(急逝)와 연이은 부모와의 사별로 칩거,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 조부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김영작(金永爵)·신석우(申錫愚)·신석희(申錫禧)·김상현(金尙鉉) 등 당대 학자들과 교유했다.
1848년(헌종 14) 중광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을 거쳐 병조정량·용강현령·부안현감·장령·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85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시찰했다. 1861년 제2차 아편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중국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세력의 실체를 목격했고, 심병성(沈秉成)·왕증(王拯)·풍지기(馮志沂) 등 중국문인과의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풍을 다졌다. 귀국 후 대사성을 거쳐,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국내현실의 모순을 목격·처리했다. 1864년 고종 즉위 후 도승지·대사헌·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7월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켰다. 1872년 강문형(姜文馨)·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한 2차 중국사행에서 서양침략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면서 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 사직했다. 1875년초 판중추부사가 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사랑방에 김윤식·김옥균·유길준·박영효 등 젊은 양반자제들을 불러모아 〈연암집 燕巖集〉·〈해국도지 海國圖志〉 및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여,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을 계발시켰다. 1875년 9월 운양호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도록 했다. 1876년 1월 수원유수로 있다가 죽었다.
 
관리가 지위를 이용해 뇌물을 받고 부패한 사례는 시대와 공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대개 뇌물과 협잡으로 이득을 본 관리를 장리(贓吏)라고 하는데, 백성의 재물을 빼앗은 탐관(貪官)과 행실이 더러운 오리(汚吏)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1900년대까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관리들의 부정부패, 비리와 관련된 기록만 5천여 건이 넘는다. 반면 국가에서 청렴하게 산 선비라 해서 표창한 청백리(淸白吏)는 강효백이 정리한 '전고대방(典故大方)'(권2)에 219명, 고종 때 편찬한 '청선고(淸選考)'(권3)에 186명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특히 관리의 비리 사건은 형조가 아닌 의금부에서 주로 취급하였다. 의금부라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추국하는 일을 관장”하였기에 오늘날 대검찰청 중앙특별수사본부와 비견될 만한 위치였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도 왕족 범죄를 비롯한 권문세가들의 비위사실을 적발하고 처벌한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법제도와 윤리 규정은 무척 정교해서 법률만 해도 1395년 '대명률'의 역본(譯本)인 '대명률 직해'(조준 등에 의해 조선 실정에 맞게 수정 보완하여 각 조문별로 번역한 것이다.)가 발간된 이래 12종의 법전이 편찬되었으며 유교적 가치규범을 훈육하는 수많은 문집들이 출판되기도 했다.
 
제도의 운용도 치밀해서 암행어사가 관리의 탐장(貪臟)을 논하면 관찰사가 직접 조사해 보고하고, 이때 무혐의로 결말이 났어도 사리가 중한 경우 의금부에서 재조사하게 했다. 탐장한 사실이 현저한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여 형벌을 내리고, 사면이 있더라도 그후 다시 임용할 수 없었다.
 
특히 장리안(贓吏案)에 기록되어 전과가 고스란히 남게 된다. 더구나 본인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과 손자는 관직(의정부,6조, 사헌부 등)에 진출할 수 없도록 장리자손금고법(贓吏子孫禁錮法)이라는 연좌제가 작용하며 이러한 자를 추천한 관리도 같이 처벌하는 거주자좌죄법(擧主者坐罪法)까지 가동하였으니 무척 강력한 통제의지와 징계 수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관리가 뇌물을 받은 경우 형전(刑典)에 의거 교형(絞刑)에 처한 사례도 있으나 대부분 대명률 직해를 준용해 장 100대에 도 3년으로 감경 처리하거나 임금이 관용을 베풀어 처리하는 허통(許通), 신병을 이유로 석방[保放]하는 등 적발과 처벌이 불균형한 문제점도 많았다.
 
아무리 제도가 정교하고 엄하다고 해도 느는 것이 장리요, 청백리는 그 수효가 늘 빈곤했다. 아쉬운 대로 청백리의 모범을 전거(典據)해 본다면 문장재학(文章才學)에서 일세의 으뜸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7)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있을 때이다. 그의 부인은 녹봉을 아껴 살뜰하게 모은 돈으로 삼백 석쯤 추수할 수 있는 땅을 사게 되었다. 그런데 땅임자는 뱃심이 두둑한 영악한 놈이었다. 청렴하기만 박규수의 속사정을 꿰뚫고 있는지라 그 땅을 갑(甲)에게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박규수의 부인에게 팔았다. 결국 한 땅을 두 사람에게 팔아먹은 셈이다.
그리하여 먼저 산 사람은 박규수에게 와서
“대감댁에서 삼백 석 추수를 하는 땅을 사신 일이 있으시죠?”
박규수는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우리 집에서 땅을 샀는지 무엇을 샀는지 모르겠네만… 하여간 그것을 왜 묻는 거요?”
“땅임자가 음흉한 놈인 것 같습니다. 소인에게 팔아먹고 또 대감댁에 팔아먹었나이다. 해서 대감을 찾아뵈러 온 것입니다.”
박규수는 이 말을 듣고 청지기를 불렀다.
“너 지금 당장 안으로 들어가 땅 산 일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하되 땅 산 일이 정말 있으면 그 문권(文券)을 가지고 나오너라.”
청지기는 땅문서를 가지고 나왔다. 박규수는 땅문서를 먼저 샀다는 사람에게 보였다. 그리한 후 박규수는 땅문서를 도로 자기가 가지고서
“그러면 내가 이 땅문서를 태워버리면 안 산 것이 되지 않겠소?”
하고 땅문서를 청지기에게 내주고 눈앞에서 태워버리게 했다.
선매자가 돌아가자 부인이
“땅문서는 어찌하셨어요?”
하고 박규수에게 물었다.
“무슨 돈으로 땅을 사가지고 나를 귀찮게 구는 게요.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소.”
“아니, 땅 산 것이 잘못 됐으면 문서라도 있어야 돈을 찾지 않습니까요?”
“말인즉 옳은 말이오. 허나 상신(相臣)이 되기가 무섭게 땅을 샀다면 그 돈이 어디서 난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이요. 또한 내가 상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땅을 가지고 어찌 백성과 쟁송(爭訟)을 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을 깊이 널리 생각하고 돈 찾을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마시오.”
박규수가 이렇게 말하자 부인도 남편의 명예를 위하여 돈 찾을 생각을 포기하고 여전히 조반석죽으로 여생을 보냈다.
 
 
박규수의 개국통상론
 
 대원군을 위시한 척화론자들은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해 화이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개항불가론을 주장했지만, 그는 서양문물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서구열강과의 교역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서기(西器)를 배워 부국강병을 도모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개국통상론은 가학(家學)인 북학해외 교류론을 바탕으로 2차례의 연행사절에서 체득한 국제정세 인식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이 시기를 서구열강이 서로 동맹을 맺고 약소국을 정벌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파악하였으며 서양세력의 강력한 무력, 그리고 조선 내부의 민심의 이반과 국방의 허실을 인식하고 큰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었다.
이에 열강의 각축하는 현실 속에서 조선이 살아남는 길은 '기의'(機宜) -시기(時期)나 형편(形便)에 알맞음-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치에서는 정치기강의 확립과 폐정개혁의 추진, 민곤(民困)의 타파와 민심의 수습, 국방강화를 위한 무기정비 등을 때를 놓치지 않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당시 농민항쟁 및 농민경제 파탄의 원인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파악했으며, 민곤타파를 위한 경제개발이나 무기제조를 위한 기술도입의 문제를 북학파가 제기했던 해외 교류론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 외교를 통해 실시되어야 할 사항으로 이해했다.
 
1861년 중국에 가기 이전에 이미〈해국도지〉-중국 청나라의 위원(魏源)이 1842년에 지은 세계 지리서- 등을 통해 미국이 예의를 숭상하는 부강국이며 국제분쟁을 잘 해결해주는 나라라고 인식, 미국과 결맹을 통해 열강의 침략을 견제하고 발전된 기술 및 필요한 물산을 도입·교역하여 조선을 부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즉 그의 개항통상론은 경제적으로 근대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정치적으로 서구열강 특히 미국과 동맹을 맺어 열강의 세력균형과 부국강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1872년 2차 중국 방문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는 청나라 양무운동-19세기말 중국 청나라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자강을 꾀하려 한 개혁운동-의 일정한 성과를 목격하고 개국통상론의 유효성을 확신했다.
귀국보고에서 청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의 화포·화륜선·양화 등을 도입해오다가 점차 그 기술을 습득하고 모방하여 자력으로 이를 제조해냄으로써 서양은 실리(失利)하고 있다고 지적, 개국통상론에 의한 부국강병책의 모델을 양무운동에서 찾았다.
 
이러한 개국통상론은 김옥균·박영효·김윤식·유길준 등 개화사상가들의 기술도입론으로 연결되었다.
 
한편 대원군정권하에서 실행될 수 없었던 개국통상론(대미개국론)은 1870년대 일본이 접근해오는 시대상황에 따라 대일개국론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일본의 서계(書啓) 문제에 대해서도 화이론적 관점이 아닌 개국통상론의 입장에서 이해했다. 즉 일본은 청나라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하고 있었기에 일본이 청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도 '대일본제국', '천황폐하' 같은 문구가 항서(恒書)되고 있지만 외교적인 전례에 따라 이를 범상하게 넘기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의 문서를 내용상에서 검토해야 함을 역설하고 자극적인 문구에 구애되는 소아적 우(愚)를 과감히 버리고 선진적인 대국적 입장을 취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개국통상론은
첫째, 개국통상은 세계사적 조류이며 그것이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는 유효한 방책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서양과 청과의 관계도 조공이 아니라 통상으로서 평등한 관계라는 것,
둘째, 서양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서양기술의 습득·이용이 필요하다는 것,
셋째, 서양기술의 습득은 그 기교에 현혹되지 말고 이(利)를 취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이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중국에서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에서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으로 표현- 이라는 초기 개화사상으로 전개되어갔다.
 
대내외적 위기라는 시대배경하에서 형성된 동도서기사상은 개화사상과 함께 국내외의 위기를 부국강병과 근대화의 실현을 통한 국가독립의 확보를 통해 극복하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한국에서의 동도서기적 개화사상은 동도 위에 서양의 과학·군사 기술을 수용하려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독립의 확보에 있었다. 그러나 개화정책을 수행하는 노선과 수행방법에 있어서는 급진적 문명개화론과 차이가 있었다.
 
 
동도서기론의 이념적 의미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질서(東道)를 지키는 가운데, 서양의 우수한 군사·과학기술(西器)을 수용함으로써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여기에서 도(道)와 기(器)는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理)가 우위에 서게 된다. 따라서 중점은 '도'(道)에 두게 되므로 기존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
 
 
한말에 전개된 동도서기론은 그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개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도서기사상과 개화사상은 근원적으로 북학파의 이용후생(利用厚生)·부국강병 사상을 모체로 하고 이를 통해 근대화와 국가독립 유지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개화정책의 노선과 그 추진방법 등에 있어서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박지원등의 북학파의 이용후생적 실학에 영향을 받은 박규수의 가교적 역할에 의하여 생긴 것은 분명하며.. 이에 발전하여 점진적혹은 급진적급진적 개화사상으로 분화한다고 보기도 한다.
첫째, 두 사상을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는 경우는 동도서기사상의 연원을 박규수(朴珪壽)에게서 찾고 1880년 초기에 사회사상으로 확립되었다고 본다. 그 핵심적 내용은 "유교적 윤리질서와 전통적 정치사회제도(東法)는 고수하고 서양의 군사기술·과학기술만 수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구체제에 대해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전반적인 혁신을 전제하지 않은 개혁론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사회 건설이라는 당시의 민족적 과제의 수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에 반해 개화사상은 1870년대에 사회사상으로 성립되어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는데...
 
하지만 박규수가 교류한 사람들의 면면이 개화파의 갑신정변등을 주도한 이들이라고 본다면 북학의 가학을 이어온 박규수의 동도서기사상이 바탕이 되어 점진적 급진적 개화사상으로 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